"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태복음 3:16-4:1)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 앞에 나와 스스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놀라운 음성이 들린 후에,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맞은 현실은 광야였다. '광야'로 번역되어 있는 '에르몬'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쓰일 때 '쓸쓸한, 적막한, 황량한' 등의 뜻을 가진 단어에 관사를 붙여 사용하는 명사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때에 왜 그분은 광야에 이끌리셨는가? 어떤 인생도 원치 않는 쓸쓸하고 적막하고 황량한 환경에 예수를 "몰아내신"(마가복음 1:12)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을 위함인가?
로마서 5장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성도의 현실을 '환난'으로 규정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영어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
"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영어 구문에서 "Not only A but also B" 라는 표현은 A보다 뒤에 나오는 B를 더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1-2절에 나오는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상태보다 성도가 경험하고 기뻐하는 현실은 '환난', '고통'이라는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환난과 고통인가? 각자가 바라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상황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로서의 고통이다. 하나님은 왜 그분 자신이 사랑하고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구원해내신 성도의 삶에 고통을 주시는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는 그 삶의 자리에서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나름 노력하고 있는 내게 왜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가? 내가 잘못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목하지 않고 계신가? 틀린 질문이다.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는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자녀의 가치를 각 인생에 구체적으로 담아가신다. 나무가 자라듯이, 생명이 자라나듯이 모든 시간과 환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담아내신다. 단순히 맞으면 그만이고 틀리면 다시 풀어야 하는 수학 문제와 같이 스스로의 인생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채점자와 같이 여긴다면 그처럼 잘못된 인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판단과 실패하는 시간을 허락하신다. 그 시간을 지나 스스로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 뜻의 위대함과 가치를 발견하기 원하신다. 인생이 만드는 최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고 악하고 부끄러운지 깨닫는 시간을 맞이하게 하신다. 청소년, 청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깊이와 의미를 담아가게 하신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노력과 의지가 인생이라는 가치를 담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를 발견한다. 자식을 바르고 지혜롭게 양육하기 위해 스스로 했던 모든 "노력"이 얼마나 기대와는 다른, 허망한 결론으로 치닫는지를 보게 된다. 내게 있는 무엇을 잘 사용하고 창조주의 뜻을 적당히 빌려내어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 지를, 창조주의 지혜와 경륜이라는 것이 도무지 인생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측량조차 못할 위대함인지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는 시간을 갖는다. 성도는 이 시간을 언제 맞이하는가? 이미 경험했다고, 안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 환난, 고통, 실패 속에서 성도는 그제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게 된다.
영국의 평론가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유익은, 고난 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
성도인 우리 모두는 종이 아닌 자녀의 신분으로 예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들이다. 자녀의 삶에 담겨지는 이해와 가치와 유익을 담아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 사랑 속에서 동시에 좌절과 고통, 문제와 환난을 허락하신다. 그 역기능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며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자라간다는 것을 시간을 지나 알게 하심으로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흔적을 갖게 하신다. 그 시간을 잠잠히 지나는 이들은 더이상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고집하지 않을 것이며 타인의 고통과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환난 중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성도의 연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로 자라나는 영광을 비추는 빛으로 심겨진 자리를 살아간다. 그 넉넉함은 환난 속에서도, 언제나 가능하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3-4)
십대교회 박준형 목사